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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각진 기하학적인 건축과 외벽의 'BAUHAUS'의 타이포그래피. 이 독일의 미술 학교는 모던 디자인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바우하우스의 뿌리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영국을 비롯한 서양 국가들에서 번성한 '아츠 앤 크래프츠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지금도 여전히 식물 문양 등 장식성이 높은 벽지가 인기를 끄는 화가 윌리엄 모리스가 주도했습니다. 산업혁명에 의해 질이 나쁜 공산품이 대량으로 만들어진 것에 이의를 제기해, 장인에 의한 '수공예의 부흥'을 목표로 한 아츠 앤 크래프츠 운동은, 그 후의 아르누보나 아르데코의 유행의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츠 앤 크래프츠 운동의 영향을 받아 1907년에는 독일에서 헤르만 무테지우스가 중심이 되어 장인과 예술가, 건축가에 의해 '독일공작연맹'이 결성되었습니다. 아츠 앤 크래프츠 운동에서의 '예술'과 '공예'로부터, '예술'과 '기계 생산'의 융합에 주목하며, 공업 제품이나 산업품의 양질화를 목표로 한 독일공작연맹의 활동은,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의 시작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1914년 '규격화'를 추진하는 독일공작연맹을 이끈 헤르만 무테지우스와 예술가의 개성·예술성을 옹호하는 아르누보를 이끈 반 드 베르드 사이에 '규격화 논쟁'이라는 대립이 일어납니다. 이 논쟁을 거치면서 지금까지의 전통적 예술이 기계 생산 사회를 따라가지 못하게 됨에 따라 새로운 '미'의 기준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만들어진 것이 바우하우스입니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 설립돼 독일공작연맹의 일원이자 헤르만 무테지우스의 뜻을 이은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초대 교장을 맡았습니다. 바우하우스는 독일어로 '건설 오두막'을 의미합니다. 그로피우스는 교사와 학생이 디자인 스튜디오나 워크숍에서 함께 기술을 추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또한, 예술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회화의 학교, 조각의 학교, 건축의 학교처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예술을 한 지붕 아래에 두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원색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심플한 디자인과 유리, 스틸, 셀로판, 합판 등 20세기 초 현대적인 소재의 사용으로 바우하우스 디자인은 대량 생산되어 많은 사람들이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1925년 데사우로, 1932년 베를린으로 이전한 바우하우스는 나치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아 1933년에 완전히 폐교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우하우스가 그동안 서양 예술에서 절대적으로 여겨졌던 황금비나 좌우 대칭 같은 전통적인 규칙과 가치관을 일단 잊고 0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려고 한 것은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또한 장인에 의한 수공예와 신기술인 기계생산의 기술을 모두 살리기 위해 형상, 색, 재료, 텍스처 등을 모두 다시 생각함으로써 현대에도 통하는 화려한 장식을 하지 않는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디자인이 탄생했습니다.

단 14년 만에 막을 내린 바우하우스지만, 유럽에서는 당시 바우하우스가 하나의 계기가 되어 '모더니즘(근대주의)'이 일어나 전통 예술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습니다. 바우하우스를 둘러싼 역사를 더듬는 가운데, 일본에 있어서의 공산품이나 공예·민예를 둘러싼 논의와 겹치는 점이 몇 개나 있었습니다. 수십 년 전, 개인의 예술성과 기술 발전을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지 않고 이를 융합하려는 큰 변화를 이끌어낸 바우하우스. 이 작은 미술 학교가 전 세계, 그리고 현대 사회에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참고자료
https://officialbauhaus.jp/blogs/magazine/what-is-bauhaus
https://bijutsutecho.com/magazine/series/s71/26965
https://artscape.jp/artword/6402/
https://ja.wikipedia.org/wiki/%E3%83%A2%E3%83%80%E3%83%8B%E3%82%BA%E3%83%A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