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만공학의 아버지·히로이 이사미]
오타루 쇼룸이 있는 오타루시는 청어 어장으로서 번창한 이후, 홋카이도의 해상 물류의 거점으로서 이용되어 온, 국내 유수의 항구 도시입니다. 개척사가 놓인 삿포로에 가까운 것, 홋카이도 최초의 철도가 오타루의 테미야-삿포로간에 개통한 것, 메이지 22년에 특별 수출항, 메이지 32년에 외국 무역항으로 지정된 것 등에서 오타루는 국내외 물류의 거점으로서 점점 발전해 갔습니다. 그에 따라, 은행이나 선박 회사, 상사등이 차례차례로 설립되어 홋카이도 경제의 중심지로서 융성을 극합니다. 이렇게 항구가 오타루와 홋카이도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만, 크고 작은 다양한 선박이 왕래하고, 하역을 하는 가운데, 겨울철에는 계절풍에 의해 바다가 거칠어지는 일이 있어, 배나 적하에 손상을 주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안전하게, 효율적으로 선박이 왕래할 수 있는 것, 적하의 반출입을 할 수 있는 것이 점점 요구되게 되어, 메이지 29년에 제국 의회에서 오타루항 수축이 의결되어 오타루항의 정비가 진행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오타루 축항 사무소의 초대 소장으로 취임한 것이 '히로이 이사미'입니다. 히로이 이사미는 현재의 고치현인 도사국의 태생으로, 11살때 상경해 현재의 도쿄대학 공학부의 전신의 하나인 공부대학교 예과에 입학해, 16살에 현재의 홋카이도대학인 삿포로농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삿포로 농학교를 졸업하고는, 개척사의 기사로서 관영 호로나이 철도의 공사나, 철도 교량 건설에 종사해, 그 후 미국이나 독일에 건너가, 치수 공사나 다리의 건설에 종사하는 가운데 그 기술을 배워, 토목공학이나 수리공학의 연구를 실시했습니다. 메이지 22년에 귀국하면 삿포로농학교의 공학과 교수로 취임해, 교수와 홋카이도청 기사를 겸무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 홋카이도 개발의 중요 사항이었던 오타루항의 수축 공사에 히로이 이사미 박사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여 오타루 축항 사무소의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히로이 박사는 항구를 강한 파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파제 건설에 착수했습니다. 물의 힘, 특히 파도의 힘은 매우 강해 국내에서 만들어진 콘크리트 방파제에서는 콘크리트에 균열이 생기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히로이는 먼저 콘크리트의 강도,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시험을 반복했습니다. 그 결과 콘크리트를 만들 때 화산재를 혼입함으로써 내해수성이 향상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화산재를 사용함으로써 공사비를 줄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로이는 방파제 공법으로 '사괴 블록'이라는 공법을 채택합니다. 이는 콘크리트 블록을 71도 34분으로 경사지게 병치하는 방법으로 당시 스리랑카 콜롬보항 방파제에서 사용하던 최첨단 공법이었습니다. 히로이는 현지 시찰을 하고 이 공법을 채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공법은 콘크리트 블록을 옆 블록에 비스듬히 기대도록 접합하는 방식으로 강한 파도의 힘을 견딜 수 있고 공사 중에도 옆 블록에 기대어 있어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메이지 30년에 착공되어 메이지 41년에 완성한 것이 '오타루항 북쪽 방파제'입니다. 이 방파제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콘크리트 외양 방파제이면서, 완성 후 110년 이상 경과한 지금도 현역으로 활약해 오타루의 항구를 계속 지키고 있습니다. 참고로 콘크리트의 강도와 내구성을 확인하기 위해 6만 개 이상의 시험 공시체(몰탈 브리켓)가 만들어져 '백년시험'이라고 불리는 내구시험이 실시되고 있으며, 100년 이상 경과한 현재에도 많은 공시체가 남아 있어 시험은 계속 진행 중입니다. 히로이는 항만의 정비와 수축 공사를 착공함에 있어 그 당시는 물론이고 100년 앞으로도 안전이 지속될 수 있도록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히로이의 토목기술자로서의 책임이자 토목공학자로서의 공학이었습니다. 100년도 더 된 기술자가 우리의 현재 생활을 지킬 생각까지 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후 오타루의 항구에는 북방파제 반대편 기슭에서 뻗어나오는 남방파제와 북방파제와 남방파제 사이에 섬방파제가 축조된 제2기 공사도 진행되어 '오타루항 외양방파제'가 완성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100년 이상의 시간 동안 오타루의 항구를 지켜 온 방파제, 그 중에서도 북방파제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콘크리트 방파제로서 2000년에 토목 학회 선장의 '토목 유산'으로 인정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또 2001년에는 '홋카이도 유산'으로도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히로이 박사는 오타루항 외에도 홋카이도 내의 항구나, 다리, 댐 등 많은 토목 공사에 종사해, '히로이 공식'이라고 하는 파도의 힘을 산정하는 이론이 쇼와 50년대까지 방파제 설계에 사용되는 등, 토목 기술자로서, 토목 공학의 교육자로서 수많은 공적을 남겨 '항만공학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항구도시로서 번창해 온 이 오타루시입니다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경치는, 히로이 이사미 박사가 지키고 싶었던 100년 후의 오타루의 경치이며, 아직도 계속 지켜 가는 경치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오타루의 거리 풍경도 또 달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매력적인 도시로 남기 위해서 우리도 현존하는 역사적인 건축물을 지키면서 현대의 삶의 용이성 양립을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타루 쇼룸
https://www.shokunin.com/kr/showroom/otaru.html
참고자료
https://www1.hus.ac.jp/~hit_doboku/doboku/1_hiroi.html
https://www.umeshunkyo.or.jp/heritage-backnumber/02otaru/data.html